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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개 선생의 파주이야기 <1> 월롱산성, 만주족의 탄생(1)

입력 : 2018-01-11 16:51:00
수정 : 0000-00-00 00:00:00

묵개 선생의 파주이야기 <1>

월롱산성, 만주족의 탄생(1)






고려시대 파주, 지금의 강남 같은 곳

파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분단의 상징인 철조망이 쳐져있는 곳입니다. 남북의 분단을 상징하는 철조망이 쳐져있지만, 더 오래된 과거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놓고 패권을 다툴 때도 임진강은 군사분계선이었습니다. 임진강 남쪽에는 신라의 성, 북쪽에는 고구려 성들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 오늘날의 강남과 같은 지역으로 예상이 됩니다. 한양은 고려시대 때 남경이라 해서 중요한 도시중 하나였는데, 파주는 당시 수도이던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가는 기에 있던 곳으로, 많은 세력가들이 파주에 땅을 마련하고, 거주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임진강변 따라 형성된 의식과 사상

파주는 파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율곡이이와 신사임당이 있습니다. 두 분 모두 돈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더 위로 올라가보면 임진강 하류에서 상류를 따라 형성된 일정한 의식과 사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방정책에서 임진강 유역 사람들은 매우 적극적인 사상을 펼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희입니다. 거란이 침략을 했을 때 담판을 해서 강동지역을 거란과 협상해서 고려의 영토로 재편입시킵니다. 역사에서는 서희가 말을 잘해서 성과를 얻어낸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만, 말 잘한다고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이 외교입니다. 서희는 국제정세에 대해 매우 정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아시아 판도는 매우 복잡했습니다. 

북서쪽에는 서하가 상당히 힘이 컸고, 여진족, 고려, 남쪽에는 송나라가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거란은 중국을 위협해서 식량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상황이었죠. 거란으로서는 북만주쪽 정세가 걱정이 되었을 겁니다. 서희는 거란과의 담판에서 어떤 조건을 제시했을 것이다. 동북3성에 있던 여러 민족을 제압하는 것을 제안하고 땅을 얻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서희는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원도 이천 출신입니다. 후대에 이런 서희의 발상을 실천했던 분이 파주 파평출신 윤관입니다. 함경도 일대로 진출하여 9개의 성을 쌓습니다. 함경남북도에 편재되어 있다고 하지만, 오늘날 연길 일대까지 만주 동북쪽 까지 윤관이 진출했다고 윤 씨 문중에서 주장합니다.





달빛 항아리 월롱, 월롱산성

저는 파주에 오랫동안 살다가, 밀양에 살다가, 최근에 서울에 올라와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파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파주에 가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역사, 크게 보면 동아시아, 더 크게 보면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경의선을 타고 가다보면 금촌역 지나 월롱역이 있습니다. 달월, 광주리 롱. 달빛 광주리. 월롱산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월롱 벌판에서 달빛을 맞은 적이 있는데, 달빛 광주리가 실감납니다. 이 월롱에 오래된 산성이 있습니다. 시야가 아주 넓습니다. 삼국시대에 한강 유역을 놓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전쟁을 할 때 처음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월롱산은 낮지만, 멀리는 강화도가 보이고, 교하가 보이고, 서울 도봉산 북한산이 보이고.... 그리고 너른 고양들에서부터, 개성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길옆에서 있습니다. 한강하구의 변화가 월롱산성에 즉각 파악해서 보고할 수 있는 요충지입니다. 서울을 진입하기 위한 마지막 산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명과 여진족 사이의 줄타기 외교를 한 광해군 

이 월롱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각축전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600년대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화 남한산성에 나왔듯이 인조반정이 있습니다. 그 이전 정권이 광해군입니다. 광해군을 정치적으로 공격을 하면서 새로운 정치권력을 세운 것. 이것이 인조반정입니다. 인조반정의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인조반정은 인조의 내정문제, 왕실내부의 권력다툼, 어머니를 잔인하게 내몰고, 동생을 죽인 것 등으로 공격을 합니다만, 사실 그 배경에는 심각한 외교문제를 둘러싼 각축전이라는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광해군의 외교를 이야기할 때, 유능했던 군주로 평가하면서, 실리외교라고 표현합니다. 조선에 임진왜란이라는 큰 사건이 일어났고, 동아시아의 중국 명, 조선, 일본 3개 나라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기회를 틈타 어부지리로 당시 만주에 살던 여진족이 흥성을 하게 됩니다. 여진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북만주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명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파견할 때,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3만 명의 기병대를 파견하여 명이 조선을 돕는 것을 같이 돕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만큼 여진족이 성장했다는 것이지요. 명나라의 주력부대가 두 개가 있었습니다. 서쪽에 있던 마씨 군사집단이 있었고, 또 하나는 이성량이 이끌던 만주병력. 이성량의 부대를 이어성이 이끌어 조선에 파병되었죠. 사실상 명나라가 북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일반 역사에는 여진족을 오랑캐, 떼놈이라 표현하지요. 이 여진족이 성장하면서 만주의 패권을 놓고 명나라와 싸움을 하지요. 사로전투. 명이 조선에 원군 요청을 합니다. 조선이 어쩔 수 없이 파병을 하지요. 강홍립이 파병군을 끌고 갑니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현지 상황을 봐서 대처하라”고 묘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강홍립이 싸우는 척하다가 여진족에게 항복을 합니다. 조선이 명과 여진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역사학자 묵개 서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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